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튤립 알뿌리 하나가 집 한 채 값으로 거래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한 장 값이 웬만한 중고차보다 비싸다. 우연일까, 아니면 인류는 400년째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숫자로 보면 일단 좀 무섭다
2025년 한 해 동안 빅테크들이 AI에 쏟아부은 돈은 대략 4,000억 달러. 그런데 그 돈으로 실제로 벌어들인 AI 매출은 1,000억 달러 남짓이라고 한다. 투자한 돈의 4분의 1만 회수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기업 상당수는 AI 투자에서 별다른 성과를 못 봤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OpenAI 얘기도 빠질 수 없다.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만 최소 1조 달러가 필요하다고 밝혔는데, 정작 연매출은 130억~150억 달러 수준. “빚내서 카지노 차렸는데 손님이 커피값만 내고 가는” 그림이 자꾸 떠오른다.
JP모건 회장 제이미 다이먼도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지금 들어간 돈 중 상당수는 결국 날아갈 거라고. 튤립 알뿌리를 사던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확신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다르다”는 확신.
근데 골드만삭스는 “아직은 아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반전. 정작 월가의 대표 비관론자 취급을 받는 골드만삭스가 “닷컴 버블만큼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근거는 이렇다.
- 지금 빅테크 7개사의 주가는 실제 벌어들이는 돈의 27배 수준인데, 이건 1990년대 후반 최고조였던 시기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 닷컴 버블 때는 매출도 없이 “story”만으로 주가가 뛰었다면, 지금은 실제 실적 성장이 주가를 받쳐주고 있다.
즉 “돈은 못 벌지만 미래를 믿는다”였던 2000년과, “돈을 벌고 있고 더 벌 계획이 있다”는 지금은 결이 다르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도 “아직까지는”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래서 국장 투자자는 뭘 봐야 하나
미국 빅테크 밸류에이션 논쟁과 별개로, 한국 투자자 입장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다. AI 버블 논쟁의 진짜 승자는 어쩌면 ‘AI 회사’가 아니라 ‘AI에 필요한 부품을 파는 회사’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내 증권가에서는 2026년 주도주로 반도체, 그중에서도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중심으로 한 SK하이닉스·삼성전자 밸류체인을 꼽는 시각이 많다. AI 학습 단계를 지나 추론과 에이전틱 AI로 넘어가면서, GPU뿐 아니라 서버 D램·eSSD 같은 메모리 전반의 수요가 구조적으로 늘어난다는 논리다. 데이터센터 CAPEX 확대의 수혜가 GPU를 만드는 미국 회사만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만드는 한국 회사에도 흘러온다는 뜻이다.
물론 “버블이 터지면 다 같이 무너지는 거 아니냐”는 반론도 유효하다. 그래서 이 논쟁을 지켜볼 때는 “AI가 거품이냐 아니냐”보다 “거품이 터졌을 때도 살아남는 실적과 현금흐름을 가진 곳이 어디냐”를 따지는 게 더 실전적인 질문이다.
결론: 튤립이었는지는 나중에 안다
버블 논쟁의 재미있는 점은, 그게 버블이었는지는 항상 터지고 나서야 확실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강세론자도 약세론자도 나름의 논리와 숫자를 갖고 있다.
확실한 건 하나. 튤립 알뿌리는 심어도 아무것도 안 남았지만, 지금 깔리는 GPU와 메모리는 적어도 뭔가는 계속 돌아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게 진짜 가치인지, 아니면 그냥 비싼 알뿌리인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이 글은 투자 판단을 위한 참고 자료이며,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투자에 대한 최종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